한국 대중음악평론의 내일을 묻는다 (서정민갑 / 보다)

2011. 3. 28. 17:44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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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대중음악평론이 본격화 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문학 평론과 미술 평론에 비해 대중음악 평론은 대중음악평론이라는 공식적 직함을 갖게 된 것이 겨우 십수 년에 불과하다. 물론 1980년대까지 경음악평론가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경음악은 클래식 음악과 비교해 대중음악을 낮춰 부르는 말이었고 그래서 서병후 같은 1세대 평론가는 스스로를 팝 칼럼니스트라고 칭했다. 이들이 담당했던 일은 주로 한국 대중음악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해외의 음악들을 소개하고 해설해주는 역할이었다. 물론 이들도 한국의 대중음악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대중음악을 유행가 이상으로 평가하는 이는 거의 없었고 영미권의 팝이야말로 수준 높은 진짜 대중음악이라고 여기는 상황이어서 한국 대중음악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음악 평론을 전업으로 하는 이도 거의 없었고 유명 DJ나 기자처럼 음악을 많이 듣거나 음악계의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이 대중음악 해설과 소개를 대중음악 평론으로 인식하며 평론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전문 월간지를 내거나 신문과 방송을 통해 좋은 음악을 소개하는 일을 주로 담당했던 이들은 한국 대중음악평론의 1세대들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만 이들은 대중음악을 특별한 연구나 학문적 분석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저널비평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로 넘어오며 상황은 급변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사상적 금기가 풀리면서 급진화된 남한의 지식인 사회는 수많은 좌파 이론들을 대거 수입하며 학문적 문제의식을 확대했는데 특히 소련의 사회주의가 무너진 뒤에는 정치경제학 중심의 거대담론에 경도되었던 지식인들이 체제 내 개혁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급선회하면서 대중문화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문화를 이야기하면 낭만적이고 한가한 태도라고 여기거나 오로지 민중문화론과 민족문화론 같은 문화의 저항성에만 관심을 집중하던 지식인들이 대중문화를 연구와 비평의 대상으로 삼고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복잡하게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와중에 돌연 대중문화는 즐기는 것이 아니라 분석하고 해석해야 하는 문제적 텍스트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다시 말해 대중문화는 저속하고 비판받아 마땅한 주류 상업문화가 아니라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며 또한 작가적 의식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게 포진하고 있는 진정성 있는 문화로 재정의된 것이다. 가령 이전까지 대중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노래의 주역이었던 조용필이 갑자기 가왕으로 재호명되고 서태지가 주류 질서의 전복자처럼 평가된 것이 바로 이즈음의 일이다. 1980년에는 좌파적인 문화혁명을 위해 운동하던 이들이 선도한 이 같은 변화는 좌파 담론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한국 대중문화의 성장과 맞물리며 대중문화의 가치를 재인식하게 만들기도 하였지만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계급혁명론을 폐기한 지식인들의 이념적 투항과 무관하지 않았으며 또한 서구의 팝 음악 역사에 무지한 자신들의 안목을 진보적인 세계관으로 숨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성우진이나 하세민처럼 온전히 팝 음악 키드로 자라나 장르 중심의 글을 쓰던 일군의 대중음악평론가들과는 전혀 다른 경로를 통해 대중문화평론에 뛰어들었던 지식인들이 선도한 이같은 변화는 지식인 사회의 지지와 엄호를 업고 대중음악평론 문화를 바꾸었다. 무엇보다 대중문화평론의 시대를 선도한 이들 대부분이 대중음악평론을 겸하며 스스로를 대중음악평론가라고 칭하면서부터 팝 칼럼니스트라는 말은 거의 사라졌다. 이들은 <리뷰>나 <상상>처럼 새롭게 등장한 대중문화 전문잡지나 <한겨레신문>, <월간 말>, <사회평론 길> 등에 음반 리뷰와 칼럼 등을 쓰면서 대중음악에 대한 분석과 논의를 이끌었다. 또한 이들의 이념적 지향에 맞게 민중가요 역시 보다 세밀하게 기록되고 분석되었다. 강헌, 김창남, 이영미로 대표되는 대중음악평론가들은 사실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노래운동에 참여하거나 문화운동을 이끌었던 평론가들로서 무크지 <노래>등을 꾸준히 펴왔으나 1980년대에는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다가 변화된 한국사회와 지식인 사회의 담론 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관심을 좀 더 확장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물론 이들의 대중음악평론은 감상평 중심의 수사적 표현과 진보적 세계관에 기초한 반영론적 가사 해석이 주류를 이루기도 했고 장르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해 록에 대한 과도한 해석 같은 좌편향적 오류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들로 인해 대중음악 자체를 좀 더 다양한 각도에서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되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본격 비평을 도입하며 전문 매체를 펴내고 대중 강좌를 진행해 대중적 영향력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천한 한국 대중음악의 계보학을 만들어 한국 대중음악의 가치를 재인식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대중음악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가능하게 만들고 이후 대중음악에 대한 진지한 탐구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또한 대중음악 자체의 미학에 충실하려 했던 이들이 펴낸 <서브>나 <핫뮤직>같은 전문 대중음악 잡지 역시 1990년대 중후반 융성했던 한국 대중음악평론 문화를 함께 이끈 주역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1990년대 후반 PC통신과 인터넷의 도입과 함께 새로운 국면으로 진화했다. 종이 매체 제작과 매체 기고, 단행본 출간 등에 한정되었던 평론 방식에서 벗어나 재정적 부담이 훨씬 덜한 웹진 형식으로 매체를 이전하면서 훨씬 적은 자본으로도 신속한 발언이 가능해진 것이다. 박준흠, 신현준, 임진모 등의 대중음악평론가들은 각각 대중음악 웹진 가슴, 웨이브, 이즘을 운영하며 각기 다른 취향과 관점을 명확히 하고 나름의 성과물들을 쌓아갔다. 박준흠이 음악창작자라는 주제로 한국 대중음악의 계보학을 쓰고 한국 인디음악 비평에 주력해 급부상한 인디음악을 옹호하며 진정성이라는 개념을 가치판단의 준거로 격상시켰다면, 신현준은 웹진 운영에 그치지 않고 국내외의 다양한 대중음악 작품 비평과 함께 작품 외적인 부분까지 아우르는 해설과 연구서적들을 계속 내놓아 일천한 한국의 대중음악 연구를 선도했다. 그는 한국의 대중음악평론가들 가운데 가장 많은 책을 내놓은 평론가로서 특히 1960~70년대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기록과 인터뷰는 전무후무한 연구결과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임진모는 저널 비평을 중심으로 한 전방위적 활동을 통해 대중음악 평론의 지명도와 친근감을 확대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박준흠이 주도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선정 작업'이나 신현준이 주도한 '한국 팝의 고고학 구술 채록 사업'은 이들이 구축한 웹진이라는 활동방식과 함께 가장 빛나는 본격 대중음악 비평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구축한 웹진은 네티즌과 평론가가 일상적으로 조우할 수 있는 공간이며 또한 새로운 신진 평론가가 등장할 수 있는 거점으로 작동하며 현재까지도 가장 일반적인 대중음악 매체로서 기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편 1998년에 출간된 이영미의 <한국대중가요사> 역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연구 결과물이며 강헌과 박준흠이 각각 주도한 자유 페스티벌과 광명음악밸리축제는 평론과는 다른 영역에서 평론의 관점으로 한국대중음악에 개입한 사례로 기록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을 거치며 한국 대중음악 평론이 일정한 한계를 맞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대중음악평론을 주도하는 평론가들이 30대 후반과 40대로 접어들며 전업적 비평만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대중음악 평론에 소흘해지거나 대중음악평론의 거점으로 만든 웹진에 주력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가슴, 웨이브, 이즘 등의 주요 대중음악웹진이 자체의 수익구조를 계발하지 못한 상황은 평론가들이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며 이는 평론가들의 선의와 책임감만으로는 평론이 생산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확인시켜주며 결과적으로 웹진에 소흘해지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리뷰를 쓰거나 책을 내는 것만으로는 생활하기 어려운 현실은 대중음악 평론이 소개될 수 있는 매체가 협소하고, 독자층 역시 많지 않으며, 대중음악 평론이 현재의 제도교육 속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일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대중음악평론가들에게 가장 현실적인 어려움이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방송국에서 일을 하거나 무슨 글이든 닥치는 대로 쓰지 않으면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은 결코 대중음악 평론만의 어려움은 아니겠지만 그밖의 다른 통로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대중음악 평론계의 숙제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대중음악평론 역시 평론가의 권위와 영향력이 급속하게 하락하고 있는 중이다. 19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평론가의 호평과 찬사가 실제 음반 판매로 이어졌던데 반해 2000년대 중후반에는 평론가의 발언은 하나의 의견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특정 뮤지션에 대한 주관적 옹호라는 비판을 받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이것은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게 된 환경의 변화와 한국 네티즌 특유의 반지성주의, 그리고 보다 전문적이고 새로운 글쓰기를 선보이지 못한 대중음악평론의 문제가 함께 빚어낸 결과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대중음악평론이 가이드 정도의 역할로 만족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대중음악평론이 소개되는 신문, 잡지, 웹진 등에서 대중음악평론은 대부분 작품에 대한 해설과 경향에 대한 코멘트 정도로 그치고 있고 그래서 비전문가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작업처럼 보이기도 한다. 갈수록 연성화되는 평론의 문제는 그러나 매체 환경의 변화만이 원인은 아니다. 평론 자체의 문제로 좀 더 파고 들어가 본다면 본격적인 대중음악평론의 역사가 10년을 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별 텍스트 비평과 장르비평에 국한된 한국의 대중음악평론이 새로운 철학적 예술적 담론과 비평의 결과물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평론의 기초는 당연히 개별 작품 비평이지만 짧은 매체의 지면에만 기대는 안이함과 형용사와 동사 중심의 수사가 난무하는 인상비평의 문제는 대중음악평론의 역할과 권위를 스스로 축소하는 주범이다. 또한 록 음악 중심의 음악관이나 음악언어 자체에 충실하지 못하는 모습과 함께 정치 사회 경제적 변화와 대중음악 판도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음악언어 중심의 주관적 비평은 모두 대중음악평론을 새롭게 변화시키지 못하고 여전히 장르비평의 좁은 울타리에 가두고 있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몇 소장 평론가들과 연구자들의 활동은 주목할 만하다. 김현준, 장호연 등의 평론가들과 연구자들이 꾸준히 내놓고 있는 <호모 무지쿠스>같은 번역서들은 대중음악 연구의 역사가 일천한 한국사회에서 보다 풍성한 논의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또한 최근 <트로트의 정치학>처럼 조금씩 활발해지고 있는 같은 독자적 연구 출판물들은 단지 좋은 작품을 가리고 소개하는 것 이상으로 대중음악 장르와 흐름, 현상을 우리 내부의 관점으로 분석하고 이해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박준흠이 주도한 <한국의 인디레이블>과 김봉현 등이 함께 쓴 <한국힙합 -열정의 발자취>같은 책 역시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를 차근차근 정리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진전이다.

최근 조금씩 늘어가고 있는 단행본들과 함께 새로 단행본을 준비 중인 나도원, 박은석, 차우진 등의 비평도 주목된다. 나도원은 진보적인 관점과 특유의 은유적인 미문을 결합시키며 대중음악의 작품과 현상을 꾸준히 분석하고 있다. 그는 아름다운 문체와 발 빠르고 사려 깊은 시선으로 오늘의 한국대중음악을 내밀하게 기록하며 한국 대중음악 평론의 전범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또한 중견평론가 박은석은 대중음악의 역사적 계보학을 정치하게 되짚어가는 연재물을 통해 음악비평의 빈틈을 단단한 인문학적 식견으로 채우고 있다. 차우진은 나도원과 마찬가지로 한국대중음악의 변화를 주의 깊게 따라가며 그동안 한국대중음악 평론에서 굳어져버린 개념들을 수정하며 현재화하고 있어 이채롭다. 가령 인디와 오버그라운드, 진정성과 대중성, 매체와 산업 같은 개념을 새로 쓰는 그의 문제의식은 현재 한국대중음악평론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임에 분명하다. 이밖에도 늘 매끈한 저널비평을 선보이는 김작가와 품격 있는 재즈평론을 쓰고 있는 김현준, 황덕호 그리고 여성뮤지션에 주목하고 있는 최지선, 블랙뮤직 평론을 도맡은 강일권, 김봉현 등의 비평도 한국 대중음악평론의 소중한 현재이다.

또한 대중음악평론가들이 주도하고 있는 한국대중음악상 선정 작업 역시 한국 대중음악 평론이 적극적으로 대중음악 비평을 외화하려는 시도로서 주목할만한 움직임이다. 한편 최근 몇 년 전부터 대중음악평론과는 다른 영역에서 꾸준히 연구 결과물을 내놓고 있는 한국대중음악학회의 움직임도 놓쳐서는 안된다. 작지만 꾸준하게 학술 심포지엄을 열어가며 학회지를 발간하는 이들의 활동은 한국대중음악 연구의 대상과 프레임을 새롭게 개척하며 확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꾸준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웹진 가슴, 리드머, 보다, 이즘, 웨이브의 움직임도 한결같다. 물론 매체 운영에 있어 다소 부침이 있고 여전히 작품 비평에 국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웹의 가능성이 무한 확대되는 상황에서도 문자 텍스트 중심의 콘텐츠만을 생산하는 문제, 쌍방향 소통이 되지 않는 1차원적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문제가 있지만 이 웹진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가 곧 한국 대중음악 비평의 변화와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전업 대중음악평론가들이 대부분 참여할 웹진 100Beat가 기존 웹진들의 한계를 얼마나 돌파할 수 있을지 매우 흥미롭다.

한국의 대중음악 산업이 나날이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대중음악 평론은 단순히 좋은 음악의 선별자와 해설자 역할만이 아니라 음악창작물과 대중, 매체와 환경, 창작자와 시스템을 아우르는 분석과 담론의 생산자로서 일상적인 평론과 구체적인 연구 결과물을 함께 내놓아야 한다. 개별 음반과 창작자에 대한 비평과 인터뷰는 당연히 계속 되어야겠지만 주관적인 취향의 수사학을 뛰어넘어 음악 언어에 대한 보다 정교한 분석과 대중음악이 닿고 연결되는 다양한 지점에 대한 정확하고 독창적인 연구가 동시에 활성화 될 때 대중음악평론은 보다 전문적이고 아카데믹한 영역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음악 스타일과 새로운 음악소비 방식이 계속 등장하는 현실에서도 리뷰와 인터뷰 중심의 비평만을 반복하는 것은 사실 너무나 순진하고 안일한 대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소녀시대의 노래가 국민적 히트송이 되고 있는 현실은 이제 대중음악평론에 문화평론을 결합시켜야 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걸 그룹의 인기는 단순히 그들의 음악만으로 구축된 것이 아니기에 이제 한국의 대중음악평론은 창작물과 창작자, 시스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흐름과 욕망까지 꿰뚫어볼 수 있는 시선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개별 대중음악평론가의 비평과 연구뿐만 아니라 대중음악평론가들의 공동 작업등을 통한 비평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다른 장르 비평과의 활발한 교류 역시 필요하다. 그 과정과 결과로서 심포지엄이나 책자 출간 같은 작업도 지금보다 훨씬 늘어나야 마땅하다.

물론 이 같은 작업의 필요성을 현재 한국대중음악평론가들이 모르는 바는 아닐 것이다. 갈수록 글 쓸 곳은 적어지는데 쏟아져 나오는 신보들과 공연은 많아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좌충우돌하고 있는 한국의 대중음악평론가들에게 직업의식만을 강요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생계형 비평만으로는 결코 궁핍한 현실도 바꿀 수 없기에 진일보한 비평의 패러다임과 활동방식을 만드는 것은 더욱 절실하다. 이제 대중음악평론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야 할 오늘, 대중음악평론가들과 음악 팬들은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 결국 질문은 다시 우리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서정민갑/보다)

출처 : http://bo-da.net/744



하세민씨의 타계와 핫뮤직의 폐간 등 굵직한 행보가 끊긴지도 꽤 지났군요
언제적 이야기냐 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저는 음악과 멀리 지냈는지도 모릅니다 (한동안)
젊은 평론가들의 왕성한 활동도 분명 존재하지만 대중 음악의 풍토가
자극의 일색이었던 만큼 비평 문화도 침체기를 맞이했던 것이 사실이니 이렇듯 썩 괜찮은 책자가
발행된 것은 분명 좋은 자극이 아닐 수 없네요 (사실 이제 알아버린 게 우스운거죠.... 2008년에 나온 책인데)

나름 비싼 가격이 책정되어있던데... 100장의 명반을 올곶이 옮겨놨으니
가격따위가 문제되진 않으리라 봅니다~
음악을 함께 들으면 읽어내려간다면 더욱 좋겠네요

(핫뮤직이 재창간 된다는 소문이 작년 말부터 있었습니다... 아무쪼록 빠른 시일내에... 제에발~)